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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남영호 침몰 사건 | 최악의 해상사고로 326명 사망

    남영호 침몰 사건 | 최악의 해상사고로 326명 사망

    1970. 12. 15. | 여수 인근 해상

    사망 326명

    과적, 항해 부주의, 대응 미숙

    남영호 침몰사고
    남영호 침몰 사건 (서귀포)

    (12월 14일)

    • 오후 5시: 남영호, 제주 서귀포항 출발 (사람 210명, 화물 150톤)
      성산항에 도착하여 무리한 과적 (정원 321명, 최대적재량 130톤)
    • 밤 8시 10분: 제주 성산항 출발 (사람 338명, 화물 450톤)

    (12월15일)

    • 새벽 1시: 남영호, 예상 도착 시간 30분 지연
    • 1시 15분: 여수 동남쪽 28마일 해상에서 거센 파도와 강풍으로 인해 선체 기울어짐
    • 1시 20분: 구조 SOS 요청하지만, 전달되지 않음.
    • 1시 25분: 남영호가 침몰하고, 승객들은 부유물에 의존하여 흩어짐
    • 5시 10분: 인글을 지나던 한국어선 희영호가 1명 구조
    • 8시 45분: 일본 어선이 사고현장을 발견해 4명을 구조하고, 일본 순시선에 연락. 순시선은 한국 해경대에 연락했지만 미수신
    • 9시: 일본 순시선은 일본국 해상보안본부에 연락해서, 한국으로 무전을 보내도록 요청, 일본국 해상보안본부는 오후12시 30분까지 제주와 부산의 해경대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미응답.
    • 12시: 일본 교도통신에서 사건을 보도했으나 해경은 전달받은 바 없다는 말 되풀이
    • 오후 1시: 한국 해경 구조 출동
    • 1시 50분: 한국 항공기 도착
    • 2시 : 일본 순시선과 어선은 총 8명을 구조함
    • 2시 15분 : 일본 해상보안본부의 무전에 대해 한국 해경에서 응답.
    • 4시 : 한국 구조선 도착, 3명 구조.
    • (12월16일)
    • 오전: 사고 생존 희박하다는 이유로 구조 중단.
    • 총 338명 중 326명 사망 또는 실종
    • 박경원 내무부 장관, 백선엽 교통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했으나 반려.
    • 관련자 처벌 : 선장, 선주, 하역업체 직원, 관련 공무원 등 총 12명 기소되었으나 선장 등 일부만 처벌을 받았다.
    • 이후 사건 덮기에 급급했던 정부와 유족들간의 충돌도 있었다.
    • 이 사고를 계기로 해상 안전 관리 시스템 개선 및 여객선 안전 규제 강화가 이루어졌지만, 여전히 해양 사고는 발생하고 있다.
    • 대형 선박사고는 과적과 날씨에도 불구하고 출항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. 매번 똑같은 원인으로 사고가 발생해 안타깝다.
    • 세상엔 양심적인 사람도 많지만, 눈앞의 이득에만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므로, 철저한 검사와 규정대로 집행하는 것만이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길이다.
  •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, 크리스마스의 비극 254명 사상

   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, 크리스마스의 비극 254명 사상

    1971. 12. 25. | 서울 명동

    사망 191명, 부상 63명
    피해액 8억 3,820만 원

    프로판 가스 취급 부주의
    및 안전설비 미비

    • 대연각호텔은 지상21층, 지하2층으로 이루어진, 당시로는 보기 드문 고층빌딩이었다. 그래서 국제 행사나 귀빈들도 모시는 호텔이었다.
    • 지어진 지 1년 6개월밖에 안 된 새 건물이었다.
    • 사고 당일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로 대연각 호텔은 많은 사람이 붐볐다.
    • 오전 9시 50분경, 1층 커피 숍에서 프로판 가스 폭발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.
    • 가장 가까운 소방서가 불과 7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, 소방서의 초기 대응이 빨랐다. 소방인력도 최종적으로는 2,000명 정도 동원될 정도로 많은 인력이 있었다.
    • 하지만, 호텔 내부에 대부분 가연성 물질로 만들어져 있어서 21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기까지는 단 1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.
    • 또한 당시 내부에 소화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, 비상구나 대피계단도 몇 없는 등 내부의 사람들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.
    • 소방 사다리차 등도 있었지만 당시는 8층 높이밖에 닫지 않아서 위쪽으로는 구조할 수 없었다.
    • 헬기가 많이 동원되었지만, 헬기가 착률할 수 있는 헬리패드가 없어서 구조에 어려움이 있었다. 헬리콥터에서 밧줄을 내려 구조하다가 추락사 하는 경우도 있었다.
    • 급한 나머지 침대 메트리스를 깔고 뛰어내리다가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.
    • 7층 이하 저층에 있던 사람들과 간신히 옥상으로 대피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불길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.
    • 화재는 7시간이 지나서야 완전 진화되었고, 건물은 전소되었다.
    • 이후 모든 고층 건물에 스프링클러 등 화재 진압 시스템 설치가 의무화 되었고, 건물 옥상에는 헬리패드를 의무적으로 확보하도록 법률이 만들어졌다.
    • 사다리차 등 소방 장비의 물적, 양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.
    • 영화 타워링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.
    • MBC 등에서 생중계 되어 처참한 광경이 그대로 방영되었다.
    • 재난을 예방하는 것이 좋지만, 발생했을 때를 피해를 최소화(fail safe1) 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.
    • 대응인력이 아무리 많아도 이러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시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.
    • 그에 따라 불연성 자재를 사용하고, 비상 대피구나 대피 계단을 만들어 대피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. 또한 초기 진화를 할 수 있도록 소화시설도 갖추고 대피 훈련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. 현재는 모두 법제화가 되었다.
    • 시설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, 시설이 제대로 운용될 수 있도록, 피난통로를 확보하고, 시설을 계속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.
    • 여유가 있을 때는 “여기서 재난이 발생하면 어떻게 되지?” 라는 망상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.
    1. 실패 하더라도 안전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전략 ↩︎
  • 이리역 폭발 사고 , 다이너마이트 대폭발로 1,402명 사상

    이리역 폭발 사고 , 다이너마이트 대폭발로 1,402명 사상

    1977. 11. 11. | 이리역(現익산역)

    사망 59명, 부상 1,343명,
    이재민 7,800여 명,
    가옥 6,800여 채 등
    재산피해 61억 원

    철도 공무원 뇌물 관행,
    화약 호송원 부주의

    이리역 사고, 이리역 폭발 사건

    이리역 폭발 사고 현장 구덩이가 크고 깊게 파인 리리역
    •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(現한화)의 화물 열차가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했다.
    • 하지만 당시 철도 공무원 사이에서는 ‘급행’이라는 명목으로 뇌물이 횡행했다.
    • 돈을 주지 않으면 열차를 제 시간에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.
    • 이에 따라 화약 호송원은 정차 시간동안 술을 마시고 무단으로 다이너마이트가 실린 화물차 안에 들어가서 촛불을 켜두고 잠이 들었다.
    • 잠에서 깨어보니 불이 화약에 옮겨 붙고 있었다.
    • 당시 다이너마이트 상자, 뇌관상자 등 화약물 30톤이 실려 있었다. 
    • 깜짝 놀란 호송원은 진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. 소화기 같은 소화기구가 없었기 때문이다.
    • 다른 직원들도 눈치를 챘지만 일부는 도망가고 일부가 남아서 진화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.
    • 결국 열차로 불이 옮겨 붙으면서, 다이너마이트 등이 반응하여 대폭발을 일으켰다.
    • 이리역사를 중심으로 지름 30m,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,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.
    •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.
    • 폭파 직후 기절했던 역무원이 정신을 차리고 들어 오려고 하는 다른 열차에 웃옷으로 신호를 보내 멈추었다.
    • 이리역에 정차 중이던 유조화차 기관사가 연락을 받고 뛰어 나와 인근 역으로 열차를 옮겼다.
    • 한국화약그룹 회장은 즉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전재산 90억 원을 모두 구호활동에 썼다.
    • 도주하던 호송원은 붙잡혀 ‘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’로 징역 10년을 받고 만기출소 했다.
    • 진입하려던 열차를 멈춘 역무원은 후에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.
    • 정부는 ‘새 이리 건설 계획’을 발표하여 이리시에 재정을 지원했다.
    • 수습과정에서 미담사례가 많았다. 자세한 것은 나무위키 참조.
    • 당시 국민가수이던 화춘화 공연 진행 도중 폭발이 일어났는데, 무명 MC가 화춘화를 구해서 화제가 되었다. 그 MC가 이주일이다.
    • 폭발 후 이리역 주변에서 어린이들 사이에 ‘목걸이 줍기’가 유행했다.
    • ‘이리’라는 지명이 사라지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.
    • 이리역이 사라지고, 익산역으로 옮기게 되었다.
    • 안전 법규는 꼭 준수해야 한다. 법은 국회의원이 통과시키지만, 법 조문 1줄에 녹아 있는 것은 실무자들 고민의 결정체이다.
    • 재난을 예방하는 게 최우선이지만, 이미 발생했을 때는 자잘못을 따지기 전에 대응체제로 신속히 넘어가야 한다.